소식지

2025 SaGA STORY 5월호

2025년 05월 31일

▶PDF 전문보기 : https://myzip.kr/EpwvtBEBP

 

교회에 처음 발걸음을 옮긴 지 2년, 제 신앙생활은 제자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왜 평일의 나와 주일의 나 사이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날까?’라는 고민을 품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교회를 다녀도 별다른 변화는 없어’라고 말할까 걱정되었고, 무엇보다 나로 인해 교회와 하나님이 오히려 비난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생으로서 적지 않은 후배들과 교수님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 고민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특히 연구실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다 보니, 저의 언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유일한 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부담이자 동시에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연구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조급해질 때에도, 후배들과 교수님 앞에서 보이는 저의 태도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지, 아니면 믿음의 걸림돌이 될지를 생각하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평일의 나’와 ‘주일의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저는 SaGA 일터선교&글로벌네트워크아카데미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고민을 가진 청•장년 세대가 한자리에서 함께 경험을 나누고, 교리로 배운 진리를 실천형 커리큘럼을 통해 삶에 녹여낼 수 있다면, ‘일터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1학기 과정을 거치며 저는 방법이나 노하우보다 더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세계관이 달라져야 행동이 달라진다’는 진리였습니다. 이전의 저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연구와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누군가 연구를 하는 이유를 물으면 “재미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으니까요”라고 답했고, 언젠가 학교 근처 고급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수업은 저의 기준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지금 제게 허락된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깨달으면서, 말로만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 고백했던 제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깨달음 앞에서 저는 제 마음속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재물과 연구 주제, 프로젝트 성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연구실에서 맞닥뜨리는 도전들이 더 이상 나를 증명할 시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의 사명으로 다가왔습니다.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연구에 임할 수 있었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비본질적인 문제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연구실 회의 중 동료가 제 의견과 다른 제안을 했을 때, 저는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 일터신학 수업에서 다니엘서를 묵상하며,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했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 앞에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사랑으로 양보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운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지에서도 비본질을 내려놓고 본질을 지킨 다니엘처럼, 이제는 연구실에서도 동료의 의견을 존중하고 협력하며, 비본질적인 사안에서는 기꺼이 양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겸손을 드러내고자 다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일터에서 기도를 습관화하는 삶’이었습니다. 연구가 어긋나거나 일정이 촉박해질 때 불평과 한숨이 먼저 나오는 저를 보며, 왜 주일의 고백과 평일의 삶에 괴리가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려 애쓰다 보니 마음이 쉽게 메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잠시 눈을 감고 “주님, 이 일도 주님의 것입니다.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평안을 주세요”라고 속삭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기도 한마디가 불평을 감사로, 조급함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며, 동료들에게도 자연스레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자유의지로 매 순간 선택하지만, 저는 그 선택의 방향키를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들이 모여, 제 안에 하나의 분명한 비전을 세워주셨습니다. 앞으로의 연구와 일상, 모든 만남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귀한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해준 SaGA 일터선교&글로벌네트워크아카데미에 깊이 감사드리며, 하나님께서 사랑글로벌아카데미를 귀하게 들어 사용하시어 2033-50 비전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앞으로도 사랑글로벌아카데미와 모든 생도를 위해 기도로 계속 동역하겠습니다.

 

 

 

 

 

 

1919년 3월 22일 김포 월곡면과 검단면을 시작으로 3월 29일까지 8일간 양촌, 고촌, 하성 등지에서 약 12회에 걸쳐 3.1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3.1운동에 참가한 집회인원은 15,000명이었다. 2025년 5월 3일 통일기도버스를 타고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대명항, 평화누리길,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을 거쳐 “통일로 생명으로” 가는 여정을 위한 77명의 통일기도마라톤이 있었다.

 

복음통일아카데미 4기를 갑작스럽게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통일 관점의 정세 또는 정치적 내용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와 지식적 측면에서 강의는 대부분이 새로운 내용이었다. 1학기 동안 28개의 강의를 들었다. 체화의 프로세스를 위해 현장 강의 내용을 메모하면서 듣고, 영상으로 반복하여 다시 들었다.

 

복음 통일의 관점으로 북한과 현 정세에 대한 맥락적 이해와 통찰을 통해 느끼고 깨닫는 부분이 있어 ‘2025 통일행전-통일기도마라톤’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역사적·지리적·정치적 상황을 체감할 수 있는 현장에서 복음통일을 위한 중보기도를 올려 드리는 것은 귀한 일이다. 현장에서 올려드리는 중보기도를 통해 주시는 비전과 사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한강 하구에 위치한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은 북한과 최접경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분단의 상징인 DMZ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154고지로서 역사적 상흔을 간직한 곳이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하는 조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남북 공동이용수역(Free-zone)에 위치하여 통일에 대한 지리적 상징성을 가진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진왜란 때의 애기봉의 역사적 스토리를, 남북한 이산가족의 사연과 같다고 하여 친필 위호를 내려 ‘애기봉’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애기봉 건너편 개성과 개풍군 일대는 복음이 왕성하게 선포되었고 교회와 병원, 학교, 사회복지기관을 설립했던 美 남감리회의 선교구역이었다. 세계 선교 역사의 한 장소이며 한국의 복음 역사의 장소이다. 강 건너는 황해북도 개성시의 조강리이다. 나는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에 있는 애기봉 전망대에 서 있다. 서로 같은 이름을 가지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조강을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통일이 되면 같은 이름으로 역사에 남기를 기대하며 또한 복음적 평화통일을 통해 복음의 역사가 재현되길 기도한다.

 

애기봉 전망 안내도를 통해 좌에서 우로 펼쳐진 13개의 지명(쌍마고지, 도고개상, 암실마을, 채석장, 해물선전마을, 개성송악산, 한터산, 석류포마음, 관산포, 임진강, 한강, 돌곶이, 파주오두산통일전망대)을 보며 수평적으로 펼쳐진 하늘과 강, 산과 마을이 주는 고요하고 스산한 적막으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전망대 아래 초소 위에 앉아 있는 새를 스마트폰으로 담았다. 분단의 고요함이 가득한 이 공간에 유일한 자유로운 존재인 듯하다. 분단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자유의 새는 북녘의 한 나무에 앉았다가 조강을 넘어왔을지 모른다.

 

애기봉 전망대에서 조강 너머 보이는 북녘 땅을 바라보고 기도한다.

북한의 수많은 영생탑이 무너지고 십자가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눈 앞에 보이는 강을 건널 수 있는 32번째 다리를 세워주셔서 분단의 아픔을 종결시켜 주옵소서!

 

 

 

대명항은 김포시 대곶면에 위치한 항구다. 염하강을 따라 강화도와 마주하며 평화누리길 1코스의 시작점이며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한강 하구의 생태적·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항구로서 남북 간 해상 교류의 잠재적 거점으로의 역할이 가능하다. 인근 김포함상공원은 한국전쟁과 해군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적 장소이다.

 

평화누리길은 한국전쟁의 역사와 통일 염원을 담은 DMZ 평화의 길 정책의 일환으로 조성된 곳으로 독특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한다. 염하강과 강화도를 바라볼 수 있는 남북의 지리적 연결성이 있는 곳이다.

 

철책선을 따라 걷는 이 길 위에서 분단의 현실을 뛰어 넘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기대하며 꿈꾼다. 복음의 소망을 품고 통일을 위한 묵상과 기도의 길을 걸었다. 통일을 위한 기도자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께서 복음통일 사역의 현장 속에서 함께 모인 77명이 통성으로 올려드린 합심기도를 기쁘게 받으셨음을 확신한다. 또한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간구는 이 곳에서 기도의 역사로 기록되었음을 확신한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마18:19 –

 

김포는 한강 하구와 접경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독립운동기념관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의 역사를 기념하며 지역 주민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의 가치를 교육하고 민족의 통합과 통일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민족 정체성과 통합의 가치를 문화적으로 전달한다.

 

1919년 김포, 그날의 민족의 함성이 하나님의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오늘 우리의 중보기도가 피흘림 없는 복음적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의 함성이 메아리쳐 저 북녘땅에 울려 퍼지게 하옵소서!

 

1919년 3월 22일 김포 월곶면과 검단면을 시작으로 3월 29일까지 8일간 양촌, 고촌, 하성 등지에서 약 12회에 걸쳐 3.1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3.1운동에 참가한 집회인원은 15,000명이었다. 독립운동기념관을 둘러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뚜렷하게 정리되었다.

 

이 나라는 6.25 이전에 독립된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독립한 나라가 내부 분열로 나누어진 것이다. 통일에 대한 염원을 독립의 역사 측면으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포 지역에 독립을 위한 항일 의병활동의 역사가 존재한다. 남북 분단 이전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운 한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의 상선에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1919년 그날의 함성은 역사·지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독립의 역사이며 하나님 복음의 역사였다. 독립을 위한 그날의 함성이 피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한 오늘 기도의 함성으로 이어짐을 믿는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 겔 36:37 –

 

피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도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 복음통일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명은 단지 ‘무슨 일을 하는가(What)’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되는가(Who)’에 관한 것일까?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바울은 30대 중반부터 약 20년간,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복음을 전하고 여러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던 바울이 50대 중반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사명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선언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이는 인생 후반부를 맞이한 바울이 자신의 위치를 재정비하며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려는 다짐이었다. 참으로 멋진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역과 사명을 동일시했던 바울의 손발을 일부러 묶으셨다. 중년처럼 활발한 사역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도 없었고, 외적으로 보여줄만한 활동도 거의 없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신 것이다. 사명은 ‘사역의 크기’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에 관한 것임을 철저히 깨닫게 하신 것이다.

 

바울의 전반기 20년은 ‘무엇을 할 것인가’(What)에 집중된 삶이었다면, 후반기 10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Who)에 집중하는 삶이었다. 하나님께서 바울 안에 패러다임의 개혁(Reformation of Paradigm)을 이끄신 것이다.

 

이 변화는 삶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중년의 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나, 노년의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화해시키는 중재자가 되었고, 빌립보 교회 안의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화해시키는 역할도 감당했다. 바울의 진정한 사역지는 이제 ‘자신의 속사람’이었다. 남의 실수를 확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덮고 화해를 독려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또한 노년의 바울은 신학적으로도 깊이를 더해갔다. 상황을 읽는 감각 역시 무뎌지지 않았고,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쓸모없는 라떼식 조언’이나 늘어놓는 노인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후대를 위한 살아 있는 유산을 남긴 이였다.

 

그가 인생 마지막 10년 동안 남긴 가장 위대한 사역은, 눈에 보이는 활동이 아니라 ‘글쓰기’ 였다. 바울은 총 13편의 서신을 남겼는데, 중년에 6편을 기록했고, 노년에 무려 7편을 성령의 감동으로 남겼다. 이는 그의 삶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영적 유산이었다. 보여주는 사역은 줄었지만, 남겨진 레거시는 더욱 깊어졌다.

 

마틴 루터의 레거시

 

청년 시절의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인물이었다. 개신교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으며, 42세에 결혼하고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죽기 3년 전, 60세 노년의 루터는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The Jews and Their Lies)』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강한 반유대주의 정서를 담고 있었고, 후에 나치 독일의 지도자들이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인용되었다. 1946년, 나치 전범 재판에서 유리아스 스트리컬은 루터의 책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만행을 변호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내면은 끝까지 개혁하지 못한 채로 인생을 마쳤다. 위대한 사역을 했지만, 위대한 사람으로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이는 사명이 단지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 라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레거시 여행: 문준경 전도사와 12사도의 순례

 

레거시 아카데미는 2024년 3월 21~22일, 77명의 참가자와 함께 특별한 레거시 여행을 다녀왔다. 스페인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한국에는 슬로우시티로 지정된 전라남도 신안의 섬티아고 순례길이 있다.

 

이 길은 신안 지역을 위해 헌신하며 고무신 9켤레가 닳도록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신 문준경 전도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정이다. 참가자들은 문준경 전도사의 삶을 체험하며, 이 시대의 새로운 문준경이 되기를 소망했다. 또한, 예수님의 12사도들이 남긴 레거시를 묵상하며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순례의 시간을 가졌다.

 

“12사도 중 가장 요리를 잘한 사도는 누구일까요? 도마!”

“12사도 중 가장 긍정적인 사도는요? 다대오! (안 되는 게 없는 사도입니다!)”

 

유머와 묵상이 함께한 12km의 여정 끝, 베드로 기념교회에서는 밤 9시 성찬식을 나누며 서로 손을 맞잡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제자가 되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다음 세대를 감동시키는 것은, 겉으로 화려한 사역이 아니라 ‘예수의 신부로서 날마다 진실되게 살아가는 삶’ 이다. 우리가 성경적 레거시의 삶을 살아갈 때, 후대는 우리의 발자취를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